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내전 (문단 편집) === 공화파의 상황 === 앞서 언급했듯이 공화파는 사기는 높았으나[* 그 높은 사기는 내전이 지속되고 공화진영 내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사람들이 피로를 겪음에 따라 1937~1938년부터 슬슬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기가 높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효율적이지 않지만 뽕은 차기 쉬운 [[반자이 돌격]]식 군사적 낭비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중앙정부와의 정치적 갈등과 맞물려 일선 부대의 사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지휘 체계의 단일화에 미적댔다. 상대편인 국민파는 그나마 일선에서 싸울 인력을 충분히 공급하면서 상대적으로 프랑코에 반항할 요인이 있었던 카를리스타들조차도 정규군 군단으로 통합된 것과 대조된다.] 단결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 내전]]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국공내전]] 당시 [[마오쩌둥]]에 비견할 만한 냉혹하고 카리스마적이면서 좌익 세력의 구심점이 될 만한 정치적 역량을 갖춘 지도자가 끝까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문제는 민주주의 정부가 이런 민주주의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지도자상이 필요했다는 점이었다. 우선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스페인 제1의 공업지대인 [[바스크]] 지역은 일단 공화국 정부 편에 서서 국민파와 싸우기는 했으나 공화국 정부와도 별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데[* 똑같이 공업화된 지역이지만 좌익/아나키즘 세력이 강했던 카탈루냐와 달리 바스크는 우익/보수적 색채가 강한 지역이었다. 산업화 당시 바스크 지역은 유럽, 아메리카와 장사해 번 돈을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현지 산업 노동자들과 소위 '민족 자본가'의 갈등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바스크 가톨릭 사제들도 스페인 전국 규모의 극우 정치판과 거리를 두어 바스크 지방 자체가 전반적으로 스페인의 다른 지방보다 좌우 계급/이념 갈등, 세속주의/가톨릭 교권 사이의 갈등이 확연하게 적었다. 때문에 바스크 지역은 좌익/아나키즘 세력이 날뛰던 공화국 중앙 정부를 혐오했지만 내전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가 하나의 스페인을 주창하며 소수문화를 힘으로 찍어누르려는 프랑코니까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자치권 확대를 약속한 공화국 중앙 정부한테 협력한 것이었다.][* 반대로 똑같은 [[바스크어]]권인 [[나바라]]는 카를리스타 세력의 본거지 격인 곳이었고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 재빠르게 레케테에게 장악당했다.] 내전 발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파한테 포위당해 고립당하자 남쪽의 공화국 정부의 지원 없이 국민파와 전쟁을 치르다가 그대로 박살났다. 그리고 이렇게 국민파가 꿀꺽한 바스크의 산업시설은 국민파가 전쟁 수행에 요긴하게 써먹으면서 국민파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에서는 국민군과 싸우는 와중에 아나키스트들과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의 혁명 여부에 대한 견해 충돌로[* 자유주의/공화주의자, 공산당(PCE), 사회주의자(PSOE)들은 '우선 전쟁부터 이기고 보자'고 했으나 아나코-생디칼리스트(CNT)들과 평의회 공산주의자들(POUM)은 스페인에 궁극적인 사회혁명을 가져오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공산당도 궁극적으로는 소련처럼 공산독재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일단은 코민테른의 명에 따라서 자유주의 공화국을 보조했다.] 같은 편끼리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내전에서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했는데[* 이후 아나키스트들과 집권여당 중 상대적으로 PSOE와 친했던 라르고 카바예로가 밀려났고 후안 네그린이 집권하면서 스페인 공화국은 공산당이 언론, 군과 정부 내의 관료를 차지함으로써 사실상 실세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와 가장 비슷한 방식으로 굴러가던 나라가 바로 [[만주국]]이다.] 이 사건은 공화군 내 결속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바르셀로나 내전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ㅡ영화 <랜드 앤 프리덤> 등을 참고하면 좋다. 또 국민파 소속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의 '제5열' 드립 이후[* 몰라가 마드리드 공세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우리에게는 공세에 참가할 4개 부대 외에도 전투가 시작되면 마드리드 안에서 봉기할 '[[오열|제5열]]'이 있다!!"고 허세를 부린 데서 유래된 말. 몰라의 마드리드 공세 자체는 탈탈 털렸고 제5열 그런 것도 전혀 없었지만, 이후 '제5열'은 공화군 내에서 일종의 도시전설이 되어 버렸으며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오열]](五列)은 첩자, 간첩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원작이었던 TV 드라마 시리즈의 한국 방영 당시 제목이 "제5전선"이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공화국 내 분파들 간에 [[우리들 가운데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우리들 가운데 제5열이 있는 것 같아']]란 의심이 갈수록 강해진 데다 제5열에 대한 두려움이 공화국 내의 소수파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공화군의 결속력은 더욱 막장의 바닥까지 떨어져 갔다. 위에서 서술한 바르셀로나 내전 같은 경우에도 양측이 서로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저놈들이 바로 제5열이다!!' 였다.[* 당시 소련과 공산당은 특히 안드레우 닌을 위시한 POUM당과 아나키스트들을 프랑코와 놀아나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모는 언플을 심하게 했다.] 또 군부의 지도력이 부재했으며 결정적으로 '''국민군보다 전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군대를 지휘한 덕분'''에 가지고 있던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앞서 언급한 온갖 뻘짓을 하면서 말아먹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내전 발발 당시 정규군 영관급 이상 고위 장교 60%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 프랑코는 반란 참가를 거부한 장교들을 잡히는 대로 처형했다. 심지어 프랑코의 사촌도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가 총살당했다고 한다.(당시 아프리카에서 근무중이였던 프랑코의 사촌은 계급은 대위였으며 전투에서 패배하고 붙잡혀 총살당했다)][* 사라고사 군 사령관이자 프랑코 이전에 임시로 국민진영에서 바지사장으로나마 수장을 맡은 미겔 카바네야스는 내전 초반에는 딱히 어느 쪽에 가담할지 결정을 안 했으나 공화진영이 포섭하기 위해 친구를 보내자 그 친구를 총살하고 국민파 가담을 결정했다.][* 국민진영의 수도 역할을 맡은 부르고스에서는 현지 사령관인 [[도밍고 바테트]] 장군은 쿠데타에 가담하기는 커녕 오히려 쿠데타에 가담하려는 부대 병사들의 소요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부관인 참모장이 그를 배신하여 체포한 뒤 부대 전체가 국민파에 합류했다. 오비에도에서는 해당 지역 군사령관인 [[https://es.wikipedia.org/wiki/Antonio_Aranda_Mata|안토니오 아란다]] 대령이 공화국 지지자로 명망이 높아 별 의심을 안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발생하자 대령이 국민파에 합류했다. 아란다 대령은 공화국에 충성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마드리드를 지키자고 선동해 오비에도 바깥으로 향하게 한 뒤, 오비에도를 장악해 현지 지사인 [[https://es.wikipedia.org/wiki/Isidro_Liarte_Laus%C3%ADn|이시드로 리아르테 로신]]과 현지 돌격 경찰대 대장인 [[https://es.wikipedia.org/wiki/Alfonso_Ros_Hern%C3%A1ndez|알폰소 로스 에르난데스]]를 포로로 잡은 적도 있었고 [[그라나다(스페인)|그라나다]]에서는 현지 사령관인 [[https://es.wikipedia.org/wiki/Miguel_Campins|미겔 캄핀스]] 장군이 공화 정부 편이어서 지사에게 부하 장교들을 믿어도 된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휘하 장교 두 명이 국민파에 가담해 캄핀스 장군을 체포한 후 그라나다를 점령했다. 그 후 캄핀스 장군은 케이포 데 야노의 명령에 따라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캄핀스의 친구인 프랑코가 케이포 데 야노에게 직접 친필 편지를 보내 감형을 요청했으나 데 야노는 프랑코의 편지를 씹었다고 한다.][* 의외로 장성급 중에는 호세 미아하와 비센테 로호를 포함해서 공화진영에 남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남은 장성의 비중은 52%) 다만 그 아래인 영관급 장교들 중에는 국민진영을 지지한 이들이 더 많았다.]했고 지금까지 스페인의 [[헌병군]] 노릇을 하는 순찰 경찰대(Guardia Civil)[* 고속도로를 비롯한 광역시외의 경찰력을 담당하는 군경 조직이다. 비슷한 시기 도심의 소요사태는 돌격경찰대(Guardia de asalto)가 담당했는데 순찰 경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들은 아무래도 시내에 거주하니 가족 친지 관계 등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와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고, 공화국 정부가 직접 창설한 조직이니 대부분이 공화파에 잔류하여 초기 공화파의 몇 안 되는 소중한 군사 경험자 집단이었고, 또 이로 인한 괘씸죄로 패전 이후 프랑코 정부에게 해산당한 다음 무장경찰대(Policia Armada)라고 하는 조직으로 대체 되었다. 그리고 이 무장경찰대는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에서 그 노골적인 억압성, 정치성 때문에 해산당하며 현대 스페인의 보통 경찰화가 이루어졌다. 덤으로, 이 돌격경찰대는 호세 칼보 소텔로를 암살함으로써 내전을 결정적으로 일으킨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 집단이기도 하다.] 70% 이상이 반군 측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전쟁 발발 이전 스페인군이 비교적 약군이었다 한들 당장 군사경험자와 무경험자의 차이가 이리 확실하게 나니 공화국 측은 처음부터 심각한 군재 부족에 시달렸고, 의미 있는 시도는 여러 번 했지만 끝까지 본질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프랑코 한 사람 밑에서 굳게 단결한 국민파에게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공화파 정부는 당시 국제 관계의 역학 자체가 아무리 공화파가 동정을 많이 사도 소위 말하는 '외교적 승리'라는게 불가능하다는 게 뻔히 보이는 와중에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한 삽질성 과시용 공세를 한 두 번도 아니고 1937년 중반부터 [[삼연벙|브루네테, 테루엘, 에브로에서 세 번이나]] 벌인 끝에 독일과 이탈리아제 무기로 중무장한 국민파가 쉽게 야전에서 공화군을 격파할 수 있도록 소중한 병력과 물자를 갖다 바쳤다. 공화파가 선전하거나 이겼던 쿠데타 당시 바르셀로나 사수, 마드리드 방어전, 하라마 고속도로 회전, 과달라하라 전투 같은 경우는 거의 대부분 내전 초기 공화국의 실제 군사력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군사적으로 공화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전투 노조 민병대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도시, 마을에서 벌인 수비전이거나, 국민파의 의표나 혹은 이탈리아군과의 연계 과정에서 생긴 실수를 어찌 잘 노려 거둔[* 마드리드 외곽의 카스티야 라만차 일대의 고속도로를 둘러싼 전투 중 공화국이 크게 승리한 과달라하라 전투가 대표적이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역포위당할 때까지 열심히 두들겨 맞으면서 미끼 역할을 하며 분투했던 공화파 부대는 바로 같은 이탈리아인들이 주축이 된 공화 인민군 제12국제여단 가리발디 대대였다. 이탈리아는 무식하게 대대적인 병력을 파견해서 남의 내전에 열심히 퍼부었는데 막상 건진 건 하나도 없었던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스페인에서 낭비한 예산, 병력, 물자를 만회하지 못하고 그 전설적인 졸전을 펼치게 된다. 이에 비해 나치 독일의 경우 [[콘도르 군단]]이라는 명칭으로 항공, 기갑 분야에서 소수의 특수 인력, 특수 부대 중심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비용을 쓰지 않았으나 히틀러가 군대를 보내고 싶었더라도 당시 독일에 파병할 만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경우였지, 일반적인 대규모 야전에서 공화파는 끝까지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차라리 스페인 특유의 험한 산지를 이용해서 게릴라 농성전으로 갔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 크게 보면 북쪽의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아 산맥, 남쪽의 과다라마, 시에라모레나 산맥 지대로 중부의 고도는 높고 평평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메세타에 자리 잡은 [[카스티야]], 그리고 험한 산지로 바스크,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같은 대도시들이 있는 지방들이 분리되어 있다. 당연히 이런 지리적 조건도 전쟁 과정에 반영돼서 카스티야 일대에선 수도 마드리드행 고속도로, 주요 거점을 두고 [[회전]]이 많이 벌여졌고, CNT 중심의 북부 전선은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을 방불케 하는 산악, 고지대 점령전이 주된 형태였다.], 실제로 1938년 중순 발렌시아의 험난한 산지에 XYZ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설치해 국민파의 공세를 돈좌시킨 적도 있었던 만큼 그 실효성은 더 높았다.[* 물론 이러한 공화국의 일련의 공세들이 삽질이 아니라 국민파의 병력과 전력을 분산시켜 마드리드에 대한 압박을 줄인다는 전략적 당위성이 있었던 작전들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허나 전략적으로는 그런 계산이 말이 된다 쳐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경험없고 미숙했던 공화국 지휘관들의 삽질로 거하게 말아먹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게다가 공화국의 수뇌부가 이렇게 바보같은 공세를 남발하기 시작한 시점 자체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이후로 원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정파간 다양함이 사라지고 대중적 기반은 적었던 주제에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설친 공산당과 이와 손을 잡은 후안 네그린 총리가 스페인의 인민전선 내 다양성을 강제로 제거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통일전선을 세우려고 한 후였다.[* 모스크바에 기반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공산당은 스페인에서 겨우 1921년에야 창설됐고, 그 세력도 다른 비소련계 좌파에 비해 세력이 현저히 적었다. 이 당시 대중적 기반과 동원력을 기준으로 두면 좌파 중에서 가장 지분이 컸던 건 누가 뭐래도 제2공화국 정권의 대표 정당이었던 사회노동당(PSOE) 산하 UGT랑 당연하게 선거엔 참여 안해도 '''정규 노조원 백만, 방계조직 2백만'''의 세력을 자랑했던 아나키스트 CNT가 서로 맞먹는 상황이었다. 공산당은 저어어 멀리 동떨어진 3위 수준의 세력밖에 없었고, 그나마 이것도 본인들 입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쑤인 트로츠키주의 계열 POUM을 위시로 한 비소련계 공산주의 정당들과 위태위태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구도를 한번에 뒤집은 게 바로 나머지 '자유' 진영의 방기와 소련의 지원이었다.] 이전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전혀 없이 공산당 쪽 지도부만 자기들끼리 짜고 전쟁을 해먹으려고 하니 이런 삽질을 태연히 저지른 것.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 건 공화국이 막상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니 제대로 망조가 났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이런 스페인 내전의 공화진영 내 파벌 갈등은 막장 그 자체였는데 바르셀로나에서 아나키스트와 정부 측 간의 내전이 발생한 것은 물론이고, 바르셀로나가 함락된 이후 패전 직전 마드리드에서 반소련적인 카사도 대령과 미아하 장군[* 마드리드 방어 책임자다.] 같은 군인들과 정치인들이 역시 들고 일어나 프랑스로 피난 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사건이 있었다. 프랑코는 이런 호재가 터지자 카사도 대령과 항복 조건을 두고 대화를 하는 척 했다가 결국 그냥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게 되었다. 즉, 공화진영은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마냥 망하기 직전까지도 자기들끼리 싸웠다는 거다. 애초에 인민전선 정권 자체가 서로 이념적 지향성이나, 기반이나 달랐던 정파들이 서로 내부에서 권력 분배 관련 합의를 하기도 전에 쿠데타가 터지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CNT, 지역 민족주의자들 같이 애초에 민족국가, 기본적인 헌정 질서 인정 여부 자체가 사회노동당, 그리고 내전 중엔 공산당이 장악한 공화 정부와 달리 하던 정파들이 바르셀로나, 바스크 같은 실제 '국토' 같은 독자적 물리력까지 얻으면서 이런 분열은 더욱 더 심해졌다. 전쟁 와중 급부상한 공산당은 이런 분열상을 타계하고 안정적인 전시 정부 체제를 꾸리려고 하였으나 당장 따라오는 소련의 지원이 막강하긴 했어도 애초에 전쟁 이전 스페인 내부에서 독자적 기반이 너무도 약했고, 오히려 갈수록 스탈린주의적 패악질로 인해 정파 간 불신은 더 조장하면서 결국 공화파의 내부 분열은 시작부터 끝까지 치명적인 패인 중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공화파를 지원했던 소련의 태도도 문제였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에 따르면 후술할 [[추축국]]의 태도와는 달리 소련은 물론 공화군이 이기면 좋겠지만 애초에 개입할 당시만 해도 당장 서방 세계를 자극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스페인 공화파 정부 편을 안 들어주면 세계적으로 좌파들에 대한 지도력에 문제가 생기니 지원해 주되 최소한만 지원하자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리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지원과 달리 그 지원도 결국에는 스페인 공화정부가 가진 금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거기다 환율도 소련에 유리하게 정하여 환차익을 상당히 챙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눈에 띈 사람이 당시 공화파 정부의 재무장관이었다가 나중에 총리가 되는 후안 네그린이다.][*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스페인까지의 운송 비용 등을 포함해서 계산해보면 소련이 별다른 차익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거기에 더해 1937년부터는 [[중일전쟁]]도 터졌기 때문에 주요 관심사가 그쪽으로 가버렸고 그 지원 역시 스페인이 애걸복걸해서 겨우겨우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상황이 이랬다 보니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은 장비와 물자의 부족으로 큰 문제를 겪었다.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서 구한 규격이 제각각인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 권총들을 쓰다 보니 총에 맞는 탄환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지금이야 서방제 소총이나 기관총들 대부분이 나토탄 계열로 규격 통일이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서방제 총기들도 국가별로 제식 탄약이 달랐다. '''당장 이후에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에서도 독일제 무기를 쓰는 폴란드 국내군에게 소련제 탄환을 공수로 뿌려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도 대충 뿌린지라 대부분을 나치에게 선물하고 말았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안 맞는 탄환을 장전했다가 총기가 고장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거기에 소련이 제공한 무기들은 전쟁 초반만 해도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당시 노획한 다국적의 구식 무기들이나 [[러시아 제국]] 시절에 생산/운용하던 무기들이 다수였는지라 안 그래도 복잡한 보급체계를 몇 배는 더 꼬아 놓았다. 게다가 소련은 이런 재고 무기를 전부 소진하고 나서야 DP28 경기관총이나 PPD 기관단총 등 자국산 최신 무기를 원조하지만 이마저도 전부 무상지원이 아닌 유상지원이었던 데다가 국민파를 지원하던 파시스트 국가들의 견제에 최신 무기들이 제대로 하역되지도 못하면서 무기 부족 현상은 거의 항상 공화파를 괴롭혔다. 잡다한 구식 무기를 최신 무기로 대체하고 보급을 일원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s-1]]에도 주인공이 길을 잃고 우연히 게릴라들의 야영지에 들어온 파시스트군 기병을 사살한 뒤 그 기병이 가지고 있던 신품 독일제 기관단총에 자기가 가진 낡은 소련제 기관단총 탄환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생략. 덤으로 그 기관단총은 파블로가 차지했다.] 무기뿐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다른 물자에서도 공화군의 보급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국민파 편에 선 [[이탈리아 왕국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공화파 항구를 해상봉쇄했고, 귀중한 소련산 군수 물자들이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오지도 못한 상태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잠수함과 군함들 사이에 껴서 지중해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일도 잦았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타 유럽국가들이 군 보급용으로 잘 썼던 [[철도]]교통은 노조들이 초반에 장악하는데 성공하고도 분기점들이 다 박살난 상태라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해군은 내전 초기부터 거의 전부가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처럼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병들이 장교를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선에 사병만 있고 장교가 없다면 전투는커녕 항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당연할뿐더러 무엇보다 지휘체계가 전무하므로 이 시점에서 스페인 해군은 그냥 무늬만 해군이 되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국민파가 공화국 해군을 제압하여 도리어 공화정부를 봉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의 부족으로 완전 봉쇄까지는 하지 못해서 소련이 보낸 무기들을 실은 선박들이 간간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이 해상 수송작전을 지휘한 이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러시아]] [[항공모함]]에 붙은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그 이름]]이 맞다. 1936년 스페인은 [[에스파냐급 전함|에스파냐급 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 2척을 비롯하여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9척, [[수상기모함]] 1척, 잠수함 14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국민파 측에 합류한 함선은 전함 1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척에 불과했다.[* 구체적으로는 전함 Alfonso Xlll, 중순양함 Canarias, Baleres, 경순양함 Almirante Cevera, 구축함 Velaso. 잠수함대의 이탈은 한 척도 없었다. 내전 중반기쯤 이탈리아가 대량의 항공기와 함께 구축함 4척, 아르키메데스급 잠수함 2척을 공여해 주기도 했다.] [[해군 항공대]]도 거의 공화파로 남았다. 국민파에 합류한 함선들은 개전 직후 페롤 해군 공창이 국민진영에게 점령되면서 도크에 있던 중순양함 카나리아스와 발레아레스같이 통째로 국민진영에 속하게 된 케이스이다. 전함 알폰소 13세는 국민파, 하이메 1세는 공화파의 기함이 되어 서로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장교진의 공백, 독일과 이탈리아의 빠른 개입과 제공권 장악으로 전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일부 함선은 물자를 싣고 오는 선박 호송을 위해, 일부는 [[바스크]]를 비롯한 북부지역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차출되어야 했다. 공군도 거의 공화파 측에 남았다. 주로 뉴폴 [[NiD 52]]나 브레게 19 같은 항공기가 주력이었고 전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제대로 된 공중전은 독일, 이탈리아의 [[He 51]], [[Ar 68]], [[CR.32]]와 소련제 [[I-15]], [[I-16]], 투폴레프 SB 폭격기가 맞붙는 1936년 11월 경부터 시작되었다. 여하간 공화파는 모을 수 있는 항공기는 다 모으려 했는데 소련제 항공기 외에도 미국으로부터 [[그루먼 FF]],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S-31, 프랑스로부터 D.371, [[D.500]] 등을 구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